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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상나침반] 시골 촌놈의 도시 사회복지사 생활
[하상나침반] 시골 촌놈의 도시 사회복지사 생활 글: 전략개발부 노흥열 사회복지사 편집 및 디자인: 혁신소통실 나는 시골촌놈이다. 소달구지를 끌고 꼴을 베러 다니고, 친구들과 늘 산과 들을 누비며 다녔었다. 그중 나랑 제일 친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이웃집에 살고 나보다 5살이나 나이가 많았지만 우린 요즘 말로 베프였다. 그 친구는 걷질 못했고 손으로 기어 다녔다. 태어날 때부터 지체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그땐 그런 사람들을 장애인이라 부르지 않았고 병*이라고 놀리며 따돌리고 함께하는 걸 꺼려했다. 하지만 난 그 친구랑 함께 다니는 것이 좋았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덤비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늘 하던 장난이 있었는데 시골 오솔길 숲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여학생들을 놀래 키는 장난을 쳤었다. 요즘 같았으면 바로 쇠고랑을 찼을 장난이었지만 그땐 정말 재밌는 놀이였다. 어느 날인가 그 친구가 보이질 않았다. 어린 마음에 걱정이 되어 매일같이 집에 찾아가 친구 아빠, 엄마한테 물어봐도 대답해 주시질 않았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생이 되어 여자친구,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다. 천사였다. 그땐 진짜 천사인 줄 알았다. 살다 보니 나한테만 천사가 아닌 듯하다…. 나는 공돌이로 여자친구는 특수교육을 전공하는 학생으로. 우린 자주 특수학교로 자원봉사를 나갔었다. 처음에는 정말 충격이었다. 장애인 친구들이 이렇게 많은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어릴 적에 함께 놀던 친구 말고도 이렇게 다양한 장애를 갖고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에 정말 충격이었었다. 충격도 잠시 열심히 자원봉사를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지금 아내는 농학교 선생님이 되었고 나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사회복지일을 15년째 하고 있다. 힘들다. 보람도 있지만 힘든 건 힘든 거다. 월급도 적다. 고향 동네 사람들은 서울 강남에서 사회복지일을 하고 있다고 하면 대단한 일을 하고 돈도 많이 벌고 있는 줄 안다. 난 반박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난 서울에 집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집의 지분은 은행이 더 많이 가지고 있긴 하지만. 복지관에 근무하면서도 수많은 인연이 있었지만 그중 한 시각장애인 어르신이 계시는데 언제부턴가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찾아오신다. 이유도 정말 다양하다. 한소네를 수리하러 오시거나, 장 보러 함께 가자고 오시고, 돈을 빌리러 오시기도 한다. 30대 중반에 중도 실명을 하고 지금껏 힘들게 살아오셨다고 한다. 그런데 나와 인연이 되고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이런저런 부탁도 하고, 가정 방문이 내 일은 아니지만, 며칠 보이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걱정이 되고 찾아가게 된다. 사회복지일이 뭐 별거 있나 크게 도와주진 못해도 한 번이라도 더 찾아가 잘 계시는지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호주머니에서 꺼내 주시는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호주머니에 있었는지 모를 사탕을 건내주시는 손길에서 따뜻한 정을 느끼며 그런 것들이 힘이 되어 지금껏 이 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만두고 싶은 생각을 하루에 열두 번도 더하곤 했었다. 지금도 그만두고 싶다. 그런데 이런 따뜻한 분들, 나 아니면 큰일 날 것 같은 착각에 매일매일 출근을 한다. 어릴 적에 헤어졌던 베프 친구를 몇 해 전 명절에 고향집에서 만났다. 그 친구는 중년의 아저씨가 되어있었고 나 또한 중년의 아저씨가 되었다. 나를 잊지 않고 우리집에 찾아왔다. 기어오지 않고 전동휠체어를 타고서 말이다. 반가웠다. 하지만 옛날 어릴 때처럼 이름을 부를 수가 없었다.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다보니. 그래서 지금은 형님이라 부른다. 명절이면 가끔씩 본다. 어릴 적에 갑자기 사라져 안 보였던 것은 장애인 수용시설로 보내졌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못 보고 지냈던 것이다. 가끔 형님을 보면 철없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좋다. 난 정통 사회복지사도 아니고 아직도 시회복지를 잘 모르지만 아직 나를 필요로 하시는 분들이 있고 나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한동안은 더 해볼 작정이다. 난 강남에서 사회복지를 하고 있는 시골 촌놈이다!!! 본문